* 내용 인용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코너명 : 4부 [ 인터뷰 제4공장 ]
■ 진행 : 김어준
■ 대담 : - 가토 유코 씨 (후쿠시마 피난민)
김어준 : 후쿠시마 방사능 이슈입니다. 오늘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후쿠시마현에 거주했던 피해 주민 한 분을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가토 유코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가토유코 : 안녕하세요.
김어준 : 제가 알기로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고 당시 사셨던 곳이 원전 사고가 발생한 그 핵 발전소로부터 얼마나 떨어진 곳이었습니까?
가토유코 : 제가 후쿠시마 사고 당시 제1원전에서 북서 방향으로 6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김어준 : 제가 알기로는 한 20km까지만 대피를 시키고, 일본 정부에서는. 60km에 대해서는 대피하라거나 떠나야 한다는 이런 방송이나 안내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 실제 어땠습니까?
가토유코 : 대피 명령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어준 : 그러니까요. 그런데 본인은 피난을 가야 되겠다고 결정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과정에 본인이 이상 증상을 느꼈고, 가족도 건강상 이상 증상을 느꼈다고 제가 들었는데 어떤 증상들을 겪으셨길래 스스로 ‘이건 피난을 가야 하는 일이다’ 라고 결정하신 건지?
가토유코 : 저는 당시에 원전이나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는데요. 그래서 일단 정보를 알아보자 하고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의 평소의 방사선량은 0.004마이크로시버트였는데 이게 서서히 올라가더라고요. 공식 기록에 따르면 평소보다 600배나 높은 24.24 마이크로시버트였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저는 전기나 수도, 가스가 끊겨서 계속 밖에 나가 있었어야 했고요. 물을 얻으러 아주 긴 줄을 서서 밖에 있기도 했습니다. 매일 밤마다 그런 가운데 복통이 없는데도 설사를 하는 거예요. 저는 그때 혼자만의 생각으로 정신적인 불안 때문에 설사를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원전이나 방사능 이런 정보를 공부를 하다 보니까 피폭에 따른 설사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럼 나의 이 증상도 피폭에 의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더 정보를 많이 찾아보니 피폭에 의한 문턱 값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 여기서 더 떨어진 곳으로 피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김어준 : 그러니까 가장 먼저 본인이 겪었던 증상은 설사. 복통이 없는데 설사만 계속 한다? 혹시 자녀에게 나타났던 증상은 없었습니까?
가토유코 : 제가 후쿠시마에서 한 500km 정도 떨어진 곳에 피난을 갔었는데 그리고 나서 한 달 후에 제 아이의 코피가 멈추지 않더라고요. 제가 처음에는 오사카에 피난을 갔다가 그 이후에 교토 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제 옆 동에 살던 중학교 남학생 역시 피난자인데 그 학생이 매일매일 코피를 흘렸었는데 그런 많은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김어준 : 후쿠시마에 피폭됐던 아이들이 일정 시점이 지나고 나서는 계속 코피를 흘리는 현상을 공통적으로 겪었다. 이런 이야기네요.
가토유코 : 2011년 여름이니까 한 5개월 정도 지났네요. 그때 제 팔 안쪽, 그리고 허벅지 안쪽, 무릎 뒤, 이런 쪽에 보지도 못했던 퍼런 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증상 하나 더 생각이 났는데요. 반년 후니까 한 2011년 겨울쯤이네요. 그때 또 갑자기 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에 했던 충치 치료했던 그 이의 주변이 계속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처음에는 신경을 안 썼는데 몇 년이 지나서 다른 피난자들을 만나서 제가 이런 이런 증상을 겪었어요, 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들도 그랬다고 이야기를 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 피폭 증상을 입었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김어준 : 설사하고, 그리고 멍이 들고, 이가 흔들리고 이런 증상들을 겪었다, 이건 피폭 증상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정부에게 치료 혹은 지원 혹은 보호를 요청하거나 거꾸로 정부가 먼저 나서서 당연히 이런 피폭 증상을 겪었던 주민들에 대해서 추적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가토유코 : 네, 전혀 없었습니다.
김어준 : 알겠습니다. 자,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서 태어났고 본인은 이렇게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빨리 피난을 왔는데 그렇게 같이 피난하지 않은 가족들, 부모님이라든가 혹시 형제분이 계시다든가 그런 분들이 여전히 그 지역에 남아 계신가요?
가토유코 : 저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독일에서 독일인 파트너와 살다가 사정이 있어서 2007년에 딸을 데리고 귀국을 했습니다. 제가 친정이 후쿠시마에 있어서 친정에서 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 집을 구하고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3년 반이 지나서 이런 원전 사고가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후쿠시마가 가장 위험하다는 정보를 제가 많이 입수를 해서 피난을 하기로 결정을 했고, 그 정보를 가족들에게 바로 전해 줬어요. 하지만 저 말고 다른 가족들은 태어나서 후쿠시마를 한 번도 나가 본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피난을 하려고 할 때 저보다 더 큰 결단을 내려야 하는 그런 가족들이었는데. 그리고 원전 사고가 일어난 바로 직후에 나가사키에서 방사선 전문가가 파견이 되어서 집회를 여기저기서 열면서 연간 100마이크로시버트 이내는 안전하다는 정보를 계속 알렸어요. 그러다 보니,
김어준 : 위험하다고 피하라가 아니라.
가토유코 : 그래서 제 가족들도 전문가 말이 옳다. 그러니까 피난을 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그곳에 남았습니다.
김어준 : 그렇군요. 그래서 믿고 거기 계속 계셨던 분들. 그분들이 당연히 피폭이 계속 됐을 텐데 그분들의 건강 문제나 혹은 생존 여부나 그런 걸 여쭤 봐도 될지, 제가.
가토유코 : 제가 피난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제 친구 중에 피난을 가고 싶었는데 사정 때문에 가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 부모님이 앓고 누워 계셨거든요, 병 때문에. 그래서 자기는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그런 것 때문에 저의 그런 결정을 시기, 질투하는 그런 면도 없지 않아서 제가 후쿠시마에서 사귀었던 그 친구들과는 거리가 좀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어준 : 그러니까 자기만 도망갔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후쿠시마에 남은 사람들 중에는 있겠군요.
가토유코 : 제가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일본에서 1960년대에 발생했었던 미나마타병이라고 아시나요? 그 병을 사진으로 남긴 유진 스미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부인인 아이린 미오코 스미스 씨가 ‘미나마타병과 후쿠시마 사고에 대응하는 정부와 문제 기업의 10가지 수법’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번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수직적인 조직을 이용한다. 2번 피해자와 여론을 혼란시키고 찬반 양론으로 유도한다. 3번 피해자끼리를 대립시킨다. 4번 데이터를 수집하지 않는다.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5번 계속 시간만 질질 끈다. 6번 피해를 축소하는 조사를 한다. 7번 피해자를 피폐하게 만들고 포기시킨다. 8번 인정 제도를 만들어서 피해자 수를 줄인다. 9번 해외에 정보를 발신하지 않는다. 10번 식자를 모아서 국제회의를 연다. 이렇게 열 가지 수법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중에 3번, 피해자끼리 대립시킨다는 부분에서 이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피난을 간 사람들에 대한 미움, 질투, 이런 것이 정부를 향한 게 아니라 그 주변인에게 마음이 향하게 되더라고요.
김어준 : 피해자들끼리 힘을 모으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자, 그러면 가족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본인의 가족들은. 남아 있던.
가토유코 : 제 가족들은 아직도 후쿠시마에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2015년부터 심근경색을 앓으시면서 쓰러지시고 그러다가 올해 2월에 돌아가셨습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보고서에 따르면 암뿐만이 아니라 뇌경색이나 심근 관련된 병도 급증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심근경색도 방사능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같이 초기에 피난을 가고 싶었지만 아픈 아버님 때문에 대피를 못했던 친구도 작년 여름에 폐암으로 사망을 했습니다. 이 친구의 폐암은 저는 피폭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어준 : 혹시 해당 지역의 사망률 같은 게 있나요? 그러니까 그 사고 이전의 사망률과 평균 사망률이 높아졌는지 그런 통계 같은 게 있습니까?
가토유코 : 후생성에서 발표한 각종 병의 사망자 수라는 게 있는데요. 그것을 봤을 때는 사고 이전보다 병에 걸려서 사망하는 숫자가 더 늘었어요. 물론 원인이 방사능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김어준 : 숫자는 늘었다.
가토유코 : 숫자는 늘었습니다.
김어준 : 자, 이건 어떻게 보십니까? 후쿠시마산 식자재, 먹거리가 일본 전역에도 유통되고 내년에는 올림픽 선수단에게도 제공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후쿠시마를 직접 겪으셨고 그리고 공부도 하셨고, 계속해서 이 사안에 대해서 알리고 있는 분으로서 후쿠시마 식자재 유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가토유코 : 저는 많은 장소에서 후쿠시마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때 어떤 참가자분이 저는 후쿠시마 식자재를 사서 먹고 후쿠시마를 응원하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안타까워요. 저는 후쿠시마에서 초기 피폭을 입은 사람입니다. 제가 어느 정도 피폭을 입었는지 간단하게 계산을 해 봤는데요. 열흘 동안 1.5밀리시버트였습니다. 보통 자연 피폭량은 1년간 1밀리시버트거든요. 저는 열흘 만에 1.5배나 넘는 것을 피폭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더 이상은 그 어떠한 작은 피폭도 입고 싶지 않아서 오염된 식자재는 먹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식자재를 먹으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어떤 분이 “당신은 참 차가운 사람이네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저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해서 후쿠시마현의 식자재를 먹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현도 정부도 검사는 하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검사 결과가 0은 아니거든요, 수치가. 검사를 하면 하한치라고 낮은 숫자가 나오는데 그러면 즉, 그 식자재에 방사선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계속 먹으면 몸에서 축척이 되겠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피폭을 입은 사람들이 “내부 피폭이 가장 위험하다.” 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보를 아니까 저는 후쿠시마산의 식자재를 먹지 않습니다. 아까 질문하신 올림픽 선수단들에게 후쿠시마현산의 식자재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 답변드리자면 그 음식을 먹을지 여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인 것 같아요.
김어준 :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먹을 건지 말 건지, 그건 그 위험도에 따라 일본 국민이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위험도를 잘 모르고 선택하는 건 문제다, 그런 취지로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올림픽 선수단에게 후쿠시마 식자재로 음식을 제공해 버리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요, 선수들에게는. 본인이라면 결정권이 있다면 이런 결정을 하시겠습니까?
가토유코 : 저라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왜 후쿠시마 식자재를 쓰려고 하는지 저는 살짝 좀 느끼는 점이 있기는 한데,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을 기점으로 후쿠시마는 완전히 복귀됐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후쿠시마 식자재를 이용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뿐입니다.
김어준 : 그런 의심들을 많이 하죠. 전 세계적으로도 의심하고, 저희도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어준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초기 피폭을 당하셨고 그리고 이례적으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200여 명과 함께 진행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시간을 빌려서 일본 정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가토유코 : 제가 소송에서 주장을 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기한 주택 제공. 두 번째는 정기 무료검진. 세 번째는 피난자들에게 직업 제공입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일본 정부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이 세 가지는 실현해 주길 바란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마지막 한 개 더 주장하고 싶은데, 토양 오염을 제대로 측정하고 그것을 매번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공표를 해 줬으면 합니다. 이것을 보고 스스로 다른 사람들이 다 판단할 수 있게 데이터를 꼭 공표해 주기를 호소하고 싶습니다.
김어준 : 알겠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정부가 책임져 줘야 하고, 그리고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이런 기본적인 요청입니다. 그게 안 되고 있다는 거죠. 자, 오늘 여기까지 나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전 사고 당시 후쿠시마현에 거주하셨고, 그리고 피폭 증상도 겪으셨고, 지금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계신 가토유코 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가토유코 : 감사합니다.
김어준 : 지금까지 통역에는
김양선 : 김양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