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 인용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코너명 : 4부 [ 인터뷰 제3공장 ]
■ 진행 : 김어준
■ 대담 : - 정영민 기자 (MBC 경남)
김어준 : 강제동원 판결 때문에 결국 지소미아까지 왔죠. 일각에서는 강제동원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야기까지 최근에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강제노동을 말하는 겁니다. 이와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올해 2월 달에 보도됐고, 그리고 후편이, 작년이군요. 작년에 보도됐고, 그 후편이 11월 14일 날 방영이 경남 MBC에 의해서 됐습니다. 못 보신 분들이 꽤 있을 텐데요.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를 1년 6개월에 걸쳐서 제작한 분을 직접 모셨습니다. 연출을 맡았던 경남MBC의 정영민 기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정영민 : 안녕하세요.
김어준 : 〈끌려간 사람들 지쿠호 50년의 기록〉, 작년에 방영된 거죠?
정영민 : 예, 작년 11월.
김어준 : 이 후속편 제목도 똑같습니까?
정영민 : 끌려간 사람들의 증언.
김어준 : 증언, 왜냐하면 실제 끌려간 사람들의 증언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분들 돌아가신 분들도 꽤 있고,
정영민 :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 돌아가셨다고 볼 수 있죠.
김어준 : 그렇죠. 그런데 그분들 육성이 남아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따져봤더니 이 강제징용 문제를 이미 70년대, 70년대인가요?
정영민 : 정확히 이야기하면 1969년입니다.
김어준 : 그러니까 재일교포시죠, 이분이.
정영민 : 예, 재일교포.
김어준 : 故김광렬 선생, 이분이 개인적으로 69년부터 이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한 문서들이 다 사라지거나 혹은 그때 강제징용 당했던 분들이 사망하기 전에 그 증언을 기록해야 되겠다고 해서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 작업을 시작하신 분인 거죠, 이분이?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그러니까 이미 69년에 강제징용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고, 그다음에 생존자들을 만나서 증언을 듣고 하신 사료들이 잔뜩 있었던 거예요, 그렇죠?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그걸 그런데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기증을 한 거죠.
정영민 : 국가기록원에 기증을 했습니다. 작년 2월이었습니다.
김어준 : 그렇죠? 그래서 이 강제징용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전에 이미 30년, 50년 가까이 개인적으로 취합한 자료 전체가 국가기록원으로 갔고, 그 이야기를 듣고,
정영민 : 취재.
김어준 : 취재에 들어가신 거죠.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50년간 축적된 자료라고 하면서.
정영민 : 엄청 방대한 양이죠. 문헌과 비문헌으로 나눠져 있는데, 문헌 같은 경우에는 기업들이 생산한 자료들, 그다음에,
김어준 : 기업들이라는 것은 강제동원 했던 전범기업들?
정영민 : 미쓰비시나 아소광업 이런 데가 대표적인 곳이고요. 비문헌 자료라고 한다면 사진이나 영상, 카세트테이프, 오디오테이프 이런 거들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 가거나, 만나거나 그러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김어준 : 그것도 70년대에 가거나 80년대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 가봐야 소용이 없잖아요.
정영민 : 폐광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분은 그 지쿠호 지역으로까지 가셨어요.
김어준 : 아예?
정영민 : 아예.
김어준 : 여기서 지쿠호라는 건 지명인데,
정영민 : 그러니까 여기가 영호남 지역이라고 보면 돼요. 13개 시군을,
김어준 : 거기에 주로 따로 탄광이 있었군요?
정영민 : 200년이나 넘습니다.
김어준 : 그래서 아예 본인은 본인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거기로 이사를 가서 거기에 남아있던 그때 끌려갔던 분들을 찾아내서,
정영민 : 그렇죠. 녹음기를 직접 들고, 메모리를 들고 이렇게. 저희가 취재 나갈 땐 취재수첩 들잖아요. 그런 형식으로 다 녹음을 해나간 겁니다.
김어준 : 정말 귀한 자료네요.
정영민 : 그분들은 해방 이후에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신 분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면서 그 폐광된 그 탄광지대에 여전히 살고 있는, 정말 악몽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텐데도 어쩔 수 없이 거기 살고 계시는,
김어준 : 정확하게 기억하는 분들이네요.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그런데 지금 소위 이 전범기업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자신들의 비위가 기록된 거니까, 예를 들어서 충분한 급여를 주지 않았다든가 혹은 줬어야 할 급여를 줬다 뺐었다든가 이런 경우들을 다 없애버렸을 거 아니에요?
정영민 : 그렇죠. 다 불태웠죠. 그러니까 이분의 기록물이 가치가 대단한 부분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이분은 어떻게 수집을 했냐 하면 전범기업들이 갖고 있는 이런 자료들을 불태워 없애버리기 전에 자꾸 방문을 하는 겁니다.
김어준 : 계속 방문해서?
정영민 : 처음에는 필사 받아 적고, 그다음에 좀 달라 그러면 당신의 노력이 가상하니까 그러면 사진을 찍어가라.
김어준 : 그때는 이렇게까지 문제가 안 됐으니까 그럴 줄 모르고, 우리 기록으로 다 남아있어 하고 준 거네요, 그때는?
정영민 : 집요하게 찾아나서 그것을 얻어냅니다, 무려 6년에 걸쳐서. 그것이 국내 최초로 드러난 명부, 조선인 명부가 있는 그 가이지마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오노우라라는 명부라는 게 있습니다. 그 명부는 직접 일본 기업이 생산한 필첩부터 해서 사망년월일, 본적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아주 귀한 자료죠.
김어준 : 본인은 이 자료를 보면서 취재를, 이 다큐를 만들면서 얼마나 하신, 1년 이상 하신 것 같은데?
정영민 :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보면 국내에서는 강제동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야기로써 나온 이야기들, 사실 그동안 위안부 문제가 더 불거졌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끌려갔고, 어떤 노역을 했으며, 어떻게 거기서 사망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완결성 있게 기록으로 남아있는 건 이게 최초다.
김어준 : 거의 유일할 것 같으네요.
정영민 : 이거 보면서 저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분의 집요한 기록하는 어떤 그런 능력, 그리고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현재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고, 어떻게 보면 매체가 완결성이 있는 거예요.
김어준 : 기자가 아예 작정하고 취재한 것처럼 하나하나를 다 따라가서 취재한 거군요, 이분이, 직접?
정영민 : 그 이상이다라고 저는 보여집니다.
김어준 : 그래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분이, 그렇다면. 그래서 본인의 기록물 전체를 이제는 조국에서, 국가기록원에서 잘 정리해서 이 사실 관계를,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 나오고 있으니까요, 지금. 10년은 우리 학자들 중에 일본이 강제로 동원한 게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갔다는 이야기까지 하잖아요.
정영민 : 반일종족주의자분들이 말씀하시죠.
김어준 : 기쁜 마음으로 갔다고. 그런데 실제, 제가 여기서부터 여쭤볼게요. 왜냐하면 맨 앞 장면이 이 지역이 나오고, 그러면서 사은비 같은 게 나오잖아요.
정영민 : 예, 사은비, 송덕비.
김어준 : 그게 뭐냐 하면 우리를 불러줘서 고맙다. 강제징용된 사람들이 그 회사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비석을 세운 게 나오잖아요. 이것도 소위 ‘봐라. 이 사람들은 기꺼이 와서 고마운 마음으로 일을 했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이런 비석도 세웠지 않느냐?’라고 증거물로 쓰이는 건데, 여기에 대한 진실이 나오는 거죠, 또.
정영민 : 故김광렬 선생님의 13만 건의 기록물을 보면 이 부분에 되게 집착을 하셨어요.
김어준 : 진짜 고마워 한 건가, 아닌가.
정영민 : 정말 그런 건가. 그래서 사진과 증언과 이런 것을 통해서 밝히시죠. 그러니까 송덕비는 * 일본 관리자에게 고마워해라. 그래서 1929년도에 먼저 세웠고, 그 후 6년 뒤에 사은비를 세웁니다. 일본 관리자한테 고마워 할 게 아니라 너네 우리 회사한테도 고마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일자리를 줬으니까. 그 사은비를 세워요.
김어준 : 개인한테도 고마워하고, 회사한테도 고마워하고.
정영민 : 그래서 그분들이 월급이 얼마 안 됐습니다. 정확한, 구체적인 급여는 안 나오지만 거의 한 달 정도의 금액을 다 넣어서. 그런데 세우는데, 이것을 주도한 사람이 *이원택과, 홍덕윤 둘 다 경남 사람으로 오노우라 명부를 통해서 밝혀냈는데, 이분들이 다 모아서 이걸 짓습니다. 세우는데, 그 기록물에 보면 거기서 도면까지 나와요. 가로 세로 몇 미터에 얼마 들었고, 비석의 받침돌은 어떻게,
김어준 : 굉장히 구체적이네요?
정영민 :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원택이 사망하고 나서 이원택의 아내인 최순덕 할머니를 거의 10년 넘게 계속 찾아갑니다. “이것 왜 세웠습니까?”
김어준 : 왜 세웠냐고, 처음에.
정영민 :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이야기를 못하시니까 故김광렬 선생님이 그 인터뷰 내용에 증언에,
김어준 : 10년…….
정영민 : 그때는 다들 그랬습니다. 이럴 수 있는 거지. 부끄럽게 여기실 게 아니고 한번 이야기해달라. 우리 취재하듯이, 인터뷰하듯이 이렇게,
김어준 : 10년을 끈질지게 물어봤더니,
정영민 :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돈을 내서 만든 것이고, 돌을 깎아서 만들었고, 일비나 이런 것도 없었다. 우리 자발적으로 한 것이다. 그런 내용이 나오고, 이것을 봤을 때 이것은 그 당시에 1935년도에 다 완성이 됐고요. 그 이후에 이게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걸 또 재건을 합니다, 39년도에. 38년도에 총동원법이 발령이 돼서 강제동원이 더 활발하게 이뤄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39년도에 다시 재건한 건 조선인들의 동원을 유리하기 위해 상징적인 기록물로, 그러니까 지금 일본이 그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그 침략의 역사를,
김어준 : 왜곡하는 거죠.
정영민 : 왜곡하고 있는 이유가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 너희들이 이렇게 세운 이런 기록물이 우리한테 있지 않냐? 그러니까 우리는 잘못한 게 없는 건데 무슨 이야기하는 거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강제식민지를 정당화하고, 그러니까 내선융화정책을 폈지 않습니까? 그 사업의 일환이었을 것 같은데, 그 진실을 파헤쳐서 이것은 민족분열, 그다음에 내선융화를 획책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그분의 저서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김어준 : 10년간 추적한 끝에?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육성을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이러한 육성을 기록하신 거예요. 우선 이 이야기, 그러니까 거기는 먹을 것을 많이 주고, 일본인들과 똑같은 정도의 먹을 것을 주고, 대단히 고마워했고, 환경이 좋아서 기뻐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지금은 돌아가신 故최종주 씨 후쿠오카 비바이 탄광에 강제징용됐던 분의 육성을 1976년에 녹취한 겁니다. 이것 먼저 들어보시겠습니다.
(음성)
김어준 : 이분 잘 들리셨는지 모르겠는데, 76년 테이프에서 딴 거라,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탄광에서 다쳐서 죽은 사람 하나도 없고, 다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거예요.
정영민 : 이 탄광에서는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강원도 분이셨습니다.
김어준 : 다른 탄광 사고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는데, 이분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故최종주 씨가 1976년에 증언하고자 했던 것은 ‘제대로 대우 받았다’ 이것에 대해서 정면 반박이 되는 내용이죠. “무슨 소리냐? 영양실조로 다 죽었다, 사람들이.” 밥도 안 줬다는 이야기예요.
정영민 : 목전에서 그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라는 거죠.
김어준 : 그러니까 여기서, 탄광에서 일을 했으면 건장한 남성들이었을 것 같은데, 와서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하니까, 전부. 엄청나게 열악했던 거죠. 그리고 이번에는 홋카이도 시카고의 광산에 징용됐다가 1979년에 故김광렬 선생과 인터뷰를 했던 故박병태 선생이 그게 얼마나 위험한 곳이었는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음성)
김어준 : 이 내용은 그런 겁니다. 대동아 전쟁이 나자 끌려왔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서.
정영민 : 끌려왔다는 게 중요하죠.
김어준 : 끌려왔고, 끌려와서 말을 안 들으면 이 돌산 같은 데서 가둬버렸는데, 돌산에 어떤 감옥 같은 곳에 가둬버렸는데, 그걸 다코베야라고 불렀다. 왜냐? 문어가 다코인데, 문어가 급하면 먹을 게 없으면 자기 발을 끊어서 먹는데 여기서는 먹을 게 없으니까 사람을 잡아먹어서 다코베야라고 불렀다. 그런 정도의 열악한 곳에 갇혔다는 거예요, 끌려와서.
정영민 : 그렇습니다. 일례로 전문가 분들은 한 사례를 들을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돌산이 있는데, 돌과 돌 사이에 이렇게 집을 하나 만들어놓고 열쇠를 채웁니다. 그래서 그 안에 집어넣고 아침에 문을 열어서 데려가고, 현장에 데려가서 일을 시키고, 그다음에 데려와서 그 안에 집고 넣고 문을 잠그고 그런 생활을 했던 거죠.
김어준 : 갇힌 거죠. 자발적으로라도 돈을 벌고, 그러니까 소위 우리가 중동에 돈 벌러 갔다는 개념처럼, 70년대에, 이렇게 이분이 돈 벌러 갔다면 이렇게 가둬놓고 이동에 자유도 없고, 그래서 힘들어서 도망가면 잡아서 사람 서로 잡을 곳에 집어넣고,
정영민 : 다코베야는 여러 의미가 있어요. 다코는 문어이고, 베야는 강인데, 자기 발을 먹을 정도로 죽어가는 곳이다. 또는 내 발을 내가 잘라서 해야지만 도망갈 수 있는 곳이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김어준 :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먹을 걸 안 주니까. 그런 이야기도 있는 거 아니에요?
정영민 : 그런 소리도 있고요. 어쨌든 다코베야는 이 홋카이도 지역에서 나오는, 그만큼 혹독했던, 거의 죄수와는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이었죠.
김어준 : 그러니까 자발적인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밥 충분히 먹으면서 노동했고, 일본에 고마워했고, 그런 주장을 지금 하고 있는데, 70년대의 현장을 경험해서 끌려갔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예요, 이게. 강제로 끌려갔고, 굶어죽었고, 혹은 너무 열악해서 도망갔다 잡히면 서로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의 곳에 갇혔다. 이게 무슨 자발적인 노동이고, 그리고 거기 감사비 같은 게 있는데, 이게 소위 선전물이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라고 50년간 자료를 스스로, 혼자 힘으로 수집했던 故김광렬 선생의 자료를 토대로 경남MBC가 다큐를 두 편 제작을 한 겁니다. 이 다큐는 유튜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정영민 : 예,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어준 :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강제징용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은데, 실상이 이렇다는 이야기죠.
정영민 : 그렇습니다.
김어준 : 이 이야기는 조금 더 저희가 할 것 같아요. 한 번 더 모실 것 같습니다.
정영민 : 감사합니다.
김어준 : 경남MBC의 정영민 기자였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