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그때그사건-인터뷰 전문] '박종철 고문사 밝힌 최 검사' 최환

공혜림

abcabc@seoul.go.kr

2018-01-0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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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환 변호사<사진=tbs 공혜림 기자>
최환 변호사<사진=tbs 공혜림 기자>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대학생 박종철군의 사망원인이 '심장마비'가 아닌 '고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데 일조한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인권 보호는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했습니다.

최 전 부장검사는 박종철 열사 31주기를 앞두고 진행한 tbs와의 인터뷰에서 "정권 안보를 위해 심장마비사로 처리하라는 상부 압박에도 나라가 보호해야 할 국민의 목숨을 오히려 빼앗은 건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신념으로 부검을 강행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이어 "80년대만 해도 의문사가 많았고, 데모 하는 학생들 잡아다가 조사하다보면 죽는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며 자신은 그저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에 고문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겠다는 평소 신념을 지킨 것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최환 당시 부장검사와의 인터뷰 전문.

- 기자: 영화 <1987>이 인기를 끌면서 부르는 곳이 많아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 최환: 나는 솔직한 이야기가 이 상태로 그냥 쭉 했으면. 내가 일을 처리했고 역사적으로 이미 매듭이 지어져 있는 상태인데.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말하면 작년에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졌고 그게 또 촛불 시위로 상당한, 그 당시에 시위는 차분하게 법을 지켜 가면서 잘 되었다고 하지만, 국민 운동으로 인해서 대통령이 그렇게 탄핵이 된 거 아닙니까. 그걸로 또 넘어가면 되는데, 이것이 왜 또 나와야 하는가. 지금 정치권이 좀 다소 서로 갈라져서 대립도 되고 하는데. 통합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정치권을 통합하는 데 도움이 되나, 운동권 출신들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겠죠. 지금 내가. 그럼 운동권들하고 누가 싸웠는가, 싸웠다기 보다 대칭점에, 그럼 공안부장인 납니다. 내가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은 386들하고 나하고의 대척점에서 일도 처리하고 같이 아웅다웅 하기도 했고, 알콩달콩 끌어 안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그런 데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예요. 정착이 됐고 나름 그 당시에 공안부장 입장에서 연행되거나 다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한테 늘 그랬거든요. 내가 선배로서, 지금 나는 뭐 여러분들을 다루는 부장검사와 여러분들을 피의자로 보는 건 아니고, 여러분보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온 선배로서, 또 여러분들은 뒤따라오는 후배들로서 때로는 여러가지 견해 차이도 있고 서로간에 충돌도 있겠지만. 그걸 내가 먼저 경험했던 사람이니까, 선배로서 충고를 한다. 그러면서 제발 학교로 들어가서, 학생이니까, 강의 받고 학업에 충실하고 나중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 같은 것을 가지고 밖에 나오면 어려운 시험도 합격하면 그에 상응하는 공적 지위가 보장되는 거고, 일반 공무원, 언론 계통으로 가서 우리 여론을 리드해가고 국민을 이끌어 가는 자리에 가걸랑 우리 정부를 배척만 하지 말고 그 정부에 들어가서 거기서 참여 속에서 개혁을 해보라. 참여 속의 개혁이라는 게 내가 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맨날 하는 민민투, 자민투, 그때 전대협, 그 뒤에는 한총련으로 커졌죠. 그러니까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내 이야기가 틀린 게 아니예요. 그때도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을 올린 사람들은 다 잘됐어요. 괜히 가서 아스팔트 위에 드러눕고 뛰어다녀봤자 돌아오는 게 뭐가 있느냐. 나중에 가서 국회의원 비서 하나 얻을 텐데. 여러분이 그렇게 안 해도 그 이상의 자리가 보장되어 있다. 여러분이 당시 1980년, 90년 386이니까.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 보고 빠르면 20년, 늦어도 30년쯤 앞으로 흘러가면 여러분 중에서 대통령도 나오고, 장관도, 국회의원도 나오고. 정치인들 나와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서. 아주 좋은 일꾼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거기서 개정도 하고 여러가지 개혁도 하면 얼마나 좋겠나 말이지. 그렇게 안 하고 여기저기서 데모나 하고. 한때 젊음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나중에 지나 놓고 보면 그렇게 지나온 여러분을 여러분 스스로 후회할 것이다.

- 기자: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관리하는 공안부장이셨는데….

= 최환: 영화 중에 당연히 압권은 박종철입니다. 박종철이 참혹한 죽음을 맞아 가면서 반복적 물고문까지 당하는. 물고문이라는 게 일제 때 일본군 헌병대에서 하던 거거든요. 그놈들은 일본군이라는, 일본의 헌병이라는 거하고. 또 당하는 우리 쪽은 식민지인 한국, 조선에, 예를 들어서 독립운동가라던가 여러 가지 망해버린 조선에 대한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잡아다가 취조하고 죽이기도 하고 그래요. 일본 때부터도 너무 무지막지한 일종의 고문으로 인한 피해, 희생자들, 피살자들 생기니까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기들도 아무리 식민 국가고, 군국주의자들이라 하더라도 사람 죽는 것에 대해서 겁이 나거든요. 누구라는 인적사항을 알면서도 숨겨 버려요. 의문사, 한 사람 추가 이런 식으로. 다시 말하면 원인 불명 사망자, 의문사죠. 의문사라는 게 그런 거 다 없어지기도 하고 해방도 되고 그랬는데. 1987년 당시까지만 해도 의문사가 몇 십 명 있었어요. 매일 매일 숫자가 늘기도 하고 밝혀지기도 하기 때문에 달라지지만 항상 두 자리 숫자가 있었거든요. 이것도 그것 때문에 그래요. 박종철군이 죽었다, 뭐 그거 뭐 흔한 일 아니냐, 데모 하는 애들 잡아다가 조사하다 보면 죽는 수도 있지,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때 태반이예요. 그게 우리 불행한, 그 당시. 당하는 사람으로 봐선 아주 불쌍한 모습이고. 그 당시 상황이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된 게 사람 목숨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느냐 이럴 거 아니예요? 대한민국이란 큰 나라가 있고 거기의 국민이라면, 다시 말하면 우리 백성들은 대한민국으로부터 우리 국민들, 우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주고 그러고선 사회 안정을 시켜 달라는. 그런 청구를 당당하게 국가에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건 거꾸로 박종철군의 경우에는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켜줘야 될 당연히 지켜줘야 될 우리 소중한 생명들이고 백성들인데, 거기에 대해서 목숨을 생명을 지켜주기는커녕 목숨을 빼앗았단 말이예요. 물고문 해가지고. 말도 안 되는 짓이거든요. 내가 격분하는 게 그거고. 내가 천하 없어도 이건 양보 못한다. 나하고 반대 진영에 있는 사람들은 그거 뭐 대학생 하나 죽은 거 가지고 나중에 화장해서 묻어 버리면 의문사 학생 추가 1 하면 될 거 아니예요. 이름도 필요 없고. 그런 식으로 늘 공모해오던 식의 안일한 생각들을 하더라구요. 나는 거기에 용납 못한다. 그래서 그렇게 내가 해서 했는데. 그래서 내 뜻을 관철시켰죠.

- 기자: 어떻게 관철시키셨어요.

= 최환: 그 사람들은 너무, 우리가 이 체제에서 나라의 대통령이나 이런 분을 모시는 자세. 정권의 안보, 그냥 안보가 아니라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너한테 와서 박종철이 간단하게 처리해 달라고 이렇게 하는데. 그냥 탁 치니까 그거 죽었으니, 심장마비로 죽은 걸로 인정하라는 거예요, 나보고도. 다들 인정하니까 그대로 화장해서 유가족에게 돌려 보내도록 허용하는 지시를 내려 달라는 거예요. 거기서 요구는 가서 화장을 해서 묻어 버리겠다. 그게 그쪽에서의 요구입니다. 그쪽이라 하면 나와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그것을 안 된다, 고문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까. 그러면 내가 열 번 백 번 검토도 했지만 그건 심장마비로 죽은 게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장마비가 왔나, 턱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이 식이예요. 의사한테 검안해 보라고 하니까 별다른 원인도 없고 심장마비입니다. 내가 황당해 가지고. 황당한 걸 가지고 내가 담당, 그날 30년 검사를 했는데 나같은 노련한 그런 부장검사한테 그거 뭐 속으로 믿으라고 한다면, 나를 아주 알기를 우습게 아는 생각인 거요. 안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하라면 당신들도 따라 오시오, 자기들이 경찰이면서. 나보고 부장검사 보고 내가 따라가겠습니까. 내가 당신들, 직무상에 상관이니까 내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내가 안 된다 했던 거예요. 그걸로 옥신각신하면서 그랬는데. 거기서 요청은 그래요. 나라 평화를 위해서, 정권의 안보를 위해서 잘 처리하겠다는 것인데. 좀 눈 질끈 감고 해주면 안 되나 하고, 나는 안 된다. 이게 지금 단순한 거지만 이래저래 그저 얻어 맞고 때리고 했다는 수준이 아니고 생명 자체를 빼앗아가 버렸으니까, 이 생명은 누가 보상하겠나.

- 기자: 그 이후에는요.

= 최환: 그 사람들도 그전에는 대공 수사 전문요원이었어요. 일반 하급 직원들이 아니고. 중간 간부 정도 되는 사람들이거든요. 경감, 경정 이런 사람들. 일선서 가면 서장도 하고 과장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와서 가지고 올 땐 나는 몰랐어요. 저 사람들이 통상 대공 사건 하면서 수사 지휘를 내가 하고, 나는 지시를 내리고 일상적인 업무의 연장으로 온 건데. 내가 볼 때 우리가 퇴근 시간이 그때 5시인데, 5시 전에 오거나 늦어도 6시경에 올 일이지. 7시 40분이나 돼서 왔어요. 이렇게 늦게 웬일이냐. 급한 일 아니면 내일 아침에 와라, 이런 식으로 농담 비슷하게 했는데. 이 사람들이 꺼내놓는 거 보니까 말도 못하고 딱 내놓고는 좀 읽어봐주십시오. 이러고 있는데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어서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이게 나와요. 이 사람은 그냥 뭐 부산 혜광고등학교 나오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간단한 개요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시법 위반이 아니라. 지금 도주 중에 있는 박종운, 그 사람도 국가보안법 위반 아니예요, 피의자를 숨겨주고 도피 시킨 사실이 있는데 그 박종운이를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조사하다가 좀 시원한 답이 안 나와서 '그럴 수가 있어' 하고 탁 치니까 억 하고 기자님 앉아 계신 데 있는 박종철군이 억 하고 쓰러졌다는 거예요.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은 하나의 경과를 설명해주는 거고. 결론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겁니다. 뭣 때문에 나한테 왔냐 그러니까, 빨리 부장님이 지휘해주셔서 이 사람 부모가, 아버지가 박정기씨예요, 아버지가 빨리 화장을 해주면 자기가 뼛가루를 영도 바다에다가 뿌리던가, 가다가 강물에 뿌리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화장장에 직원들을 비상 소집해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빨리 지휘를 해달라 이거예요. 가만히 들어 보니까, 자꾸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고문했구나, 당했구나, 고문한 거구나 자꾸 들어와요. 직감적으로. 그러니까 내가 당신들 뜻대로 하시오, 할 수 없잖아요. 그거 고문한 것 같은 의심이 든다 그랬더니 펄쩍 뛰는 거야. '아이고, 부장님, 저희들이 언제 고문하는 거 봤습니까.' 거기서 또 고문 안 했으면 공안부장 돼서 몇 년 동안 일하는데 복도에 서서 고문 당한 우리 아들, 조퇴해 달라던가 들어올 때마다 공안부장 하는 내 방 앞에 저기서부터 고문 추방 피켓 들고서 고문 좀 다스려 주십시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문 타령이었어요. 그런 시기였으니까, 고문이란 소리에는 내가 굉장히 날카롭게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무슨 문제가 했느냐면. 그렇기 때문에 그때마다 나는 고문이라는 건 어떻게 근본적인 해결을 봐야겠다, 고문 당한 사례가 뭐 있는가 하면 1985년도에 김근태씨 고문 시비. 86년도에는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도 있고. 계속해서 일반 사건까지, 공안 사건 아닌 일반 사건까지 파급적으로 경찰을 거쳐서 온 사건들의 피의자, 그 가족들은 늘 한다는 소리가 고문 좀 추방해 주십시오, 고문 때문에 우리 아들, 딸들이 지금 형편없이 당하고 있습니다, 나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고문에 대해서는 공안부장을 하면서 내가 뭔가 시범을 보여줘야겠다 생각을 가졌던 겁니다. 그분들이 내놓은 거 보니까 내가 점점 볼수록 고문했습니다, 라는 자백서 비슷하게 보여져요. 이 학생이 키도 크고 170cm쯤 돼요, 몸무게도 제법 나가는데, 60kg인가 돼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심약해서 탁 치니까 억 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키나. 의사한테 물어보시오 하니까 이 사람들이 말을 못해요. 두 번째로 이 사람들이 죽은 애가 서울대학교에 자기 모교인 혜광고등학교에서는 천하의 수재라고 하면서 학교 앞에 교문에는 일년내내 우리의 영웅, 우리의 형,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그렇게 추앙도 받고 모든 학부모, 박정기씨의 자랑스런 아들이었고 이랬는데 죽었다고 하니 그걸 어떻게 와서 아들을 어떻게 키운 아들이고, 앞으로 장래가 충만한 소중한 아들인데 죽었으니 어떻게 하다 죽고 그걸 어디서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나 내 눈으로 봐서 보고싶다 당연히 부모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이야기도 없어. 무슨 강아지 내버리듯이 화장해서 얼른 뼛가루를 보내주세요, 이상 끝 하는 부모가 어딨어요. 없어요. 이 자체가 꾸며낸 일종의 허구라고. 그 사람들한테 제대로 이야기를 안했거나, 애기했더라도 윽박지르거나 하면 시골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가는 거지. 내가 한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2시간이 다 가요. 7시 40분부터 9시 반쯤 되니까 나도 배도 고프고, 내가 밥 사준다 해서 하실 분도 아니니까. 오늘은 그냥 갑시다 했더니 그럼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내일 아침에 남영동이 용산경찰서 관내에 있는 경찰 관할이니까, 거기서 발생했으니까 용산경찰서장 이름으로 변사사건 발생 보고를 가지고 와라, 그럼 내가 처리해주겠다 이렇게 해서 보냈습니다. 둘 보고 앉아서 콩이니 팥이니 하면서 바둑 논리에 따라서 흑이니 백이니 해서 시간을 헛되이 보낼 필요가 없어요. 해봤자 이 사람들은 실권도 없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아시고 가시오 했더니, 내일 오면 꼭 해줘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이야기했고 오늘 가서 지금 시체에 대해서 지휘를 안 내리고 보존을 했으니까, 화장장 가동하고 있고 지금 시체 손대면 내가 가만히 안 있는다고 시체 보존 명령까지 내렸어요. 안 그러면 내가 없는 동안에 홀랑 화장했으면 어떡합니까. 나중에 와서 '아이고. 부장님 설명 듣고 지휘 받는 사이에 밑에 있는 직원이 알지도 못하고 태워버렸다'고 하면 그냥 부검도 못하고 사망 원인을 영원히 밝혀내지 못하는 그런 상황까지. 조금 빈틈도 줄 수 없어요. 이 사람들은 천하 없어도 너희들 가서 관철시키라고, 나한테 사정하라고 지시 받고 왔거든. 그 사람들, 상부 지시라면 물불 안 가려요. 공안 부장님도, 같은 공안 요원인데, 저 위에 상부에서 지시한 건데 눈 질끈 감고 도장 찍고 보내주면 되는데, 왜 안 그래줍니까 이 이야기예요. 그게 그분들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윗분이 모시는 분의 정권 안보를 위해서도 이것은 끝까지 심장마비로 관철시키겠습니다는 이야기. 나는 이건 그게 아니다.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딨나, 이 중요한 목숨을 빼앗겼는데, 누가 밝혀주나.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들은 가서 이야기가 안됐습니다, 이마에 바늘 찔러도 피도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나한테 전화 와서 너 어떻게 공안부장 하는데, 공안부장이 그렇게 정권 안보에 둔갑하냐 이거지. 상부의 지시라고 하면 두말하지 않고 따를 일이지, 왜 거기다가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내가 계속 협박에 회유에. 또 아침에 일찍 가져와라, 집에 갔다가 전화가 하도 많이 온다길래 동생 집에 가서 하룻밤 숨어 있었어요.
그 뒤에도 기회만 있으면, 핑계거리만 있으면 부검 안 하고 다시 해부 안 하고, 화장해서 덮어버리고 넘어가는 걸로 경찰은 계속 하고, 그것은 저 위에 청와대고, 안기부고 다 일체감 있게 움직인 거예요, 나만 빼놓고. 우리 상부에서는 나한테는 이래라 저래라 아무도 이야기 안 했어요.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최환 부장을 우리가 믿는다 이거지. 그분들이 믿는다는 게 어떤 방향으로 가는 걸 믿는다는 건지 모르고 이야기하신 건데. 그러나 최환 부장에게 맡기면 정의롭게 처리할 것이다 보신 거예요. 시신을 왕십리에 있는 경찰 병원에다가 옮겨 놓고선 내놓질 않으니까. 우리가 아무리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받아서 집행하려고 해도 시신이 없으면 집행 못하거든요. 이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바리게이트 쳐서 한번 더 해보려고 하다가 하도 안 나오고 나를 괴롭히고 하니까, 내가 한바탕 호통을 치는 전화를 했죠. 영장을 받아서 우리가 부검을 하기 위해서 많은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경찰 병원에서 시신을 안 내준다고 하니 그건 현행법에 다시 말하면 우리 부장검사의 영장 집행, 거기에서 부검 집행의 공무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내가 지금 당장 출동해서 본부장, 부장, 처장 현행범으로 잡아들이겠다 그랬더니. 거기서 사람들이 눌린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그 당시는 검찰을 말 제대로 안 듣고 누르려고 하는 기세가 보일 때예요, 경찰에서, 청와대가 좀 밀어주니까. 그렇게 해서 부검을 하기로 했는데. 부검할 때도 거기서 전화가 와요. 지금 시체를 내놔서 부검을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어디서 할라고?' 하니까 경찰 병원에서 하지요. 내가 그랬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경찰에서 대공 수사 하다가 사람이 고문 당해서 죽었는데 그것을 다시 또 경찰 산하에 있는 경찰 병원에다가 옮겨 놓고 거기서 또 경찰 병원 의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하고 둘이 하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경찰 산하 기구예요. 그럼 이걸 누가 믿느냐'. 그럼 어떻게 할까요, 가까운 왕십리에서 경찰 병원에서 가까운 데가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이니까 거기다가 가지고 가서 시신을 옮겨서 거기서 부검합시다, 했더니. 거기서는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다만 한양대 병원으로 옮겨 가는데, 우리 경찰 병원 의사, 국과수의 법의가 따라가도록 하자, 그래서 좋다. 그래서 경찰이 가라앉은 거예요. 내가 거기서 마음 놓고 그냥 거기서 끝맺음을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 돼요. 왜냐하면 거기 사람들이 따라 가서 한양대학 병원, 장소만 빌려서 부검했다 하더라고 그 결과는 나중에 경찰 병원 의사하고 황적준 박사하고, 거기서 준다 이겁니다. 실제론 화장하고 나서. 이 사람들이 다른 소리 못하게 윽박질러서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할 것 같아서 한양대학교 병원장에 전화해서 노련한 부검의사 한 명 지원해 달라, 그래서 세 사람이 갖다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조작을 못하지요. 그때 그때마다 특이한 소견이 하나씩 나오면 세 사람이 보는 사이에서 전부 검사들 사인하고 의사들 사인 다 시키면 나중에 자기들이 말을 못 바꾸잖아요. 주도면밀하게 했어요. 안 그러면 그 판에서는 요만큼 허점만 보이면 당하고. 나중에는 거꾸로 나중에 윗사람 핑계 대서 누르고.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해도 기발하기도 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게 대처해서 깨끗하게 처리했다, 거기에 대해서 전부 다들 이야기는 어떻게 그렇게 꼭 완전히 독안에 든 쥐 몰아 세우듯이 힘껏 밀어부쳤나 하는데, 내가 억울한 사람 목숨, 그걸 명쾌하게 해결해 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영 의문사 하나 더하는 걸로 해서 가족들의 한과 본인의 원한을 가지고서 세상에 하직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그래서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이 사람이 앞으로 역사에, 다시 말하면 민주화 운동이든, 고문 추방 운동이든 그런 데 이 사람이 거기에 영원히 빛나는 이름으로, 박종철, 이렇게 열사 붙여서 나오게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학교 후배, 박종철군한테, 그 가족들한테 선물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생각까지 했어요.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니까.

- 기자: 당시 청와대가 개입된 상태라 결단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 최환: 그게 정권 안보 개념으로 본 거예요. 정권 안보면 전두환 대통령이 아무런 의미도 안 주는데, 본인들이 한 건 아니거든요.
청와대에서 누가 나서서 이야기한 건 없어요. 지금 밝힌 것도 나한테 간접적으로 온 건 있어도, 누구라 하면 중간에서 전달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소용없어요. 받아낼라 해봐야 참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립니다. 부검 마치고 돌아온 경찰 병원 의사하고 황적준 의사하고 불러서 경찰 수뇌부에서 물어보는 거예요. 황적준 박사가 '물고문으로 결론 났습니다' 하니까, '뭐?' 하고선. 황적준 박사는,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발길질 못하니까 경찰 병원 의사 관절을 까고 그랬어요. '인마, 내가 말한대로 심장마비로 하라면 할 일이지, 무슨 놈의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그런 분위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위에서 지시한 것은 정권 안보를 위해서는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거고, 나는 정권 안보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불쌍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한테 사인을 밝혀서 정의롭게 처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큰 정권 안보에 기여 수단이 될 것이다, 난 또 그렇게 이야기해서. 내가 토를 달았다고 나를 미워하는 겁니다. 위에서 내려간 지시니까 눈 감고 해주지, 왜 안 해줬어, 이거예요. 지금까지도 쭉 나에 대한 거부감, 이런 것을 갖고 있어요. 해가 바뀌고 돼도 현직에서 상당히, 내가 볼 때도 일 많이 하고, 유사 이래 없는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현직 대통령 거액 뇌물 수수 사건으로 구속했잖습니까. 두 번째로 12.12 쿠테타 다시는 일으키지 못하도록 쿠데타에 대한 징벌도 했어요. 그 다음으로 광주 80년 5.18 때는 그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했습니다. 폭도들로 볼 수 없고, 내란 일으킨 걸로 볼 수 없고 폭도들보다 진압하느라 경찰, 군인이 총을 쏘고 그랬지 않습니까, 몰려 오니까 거기에 따라서 광주의 질서 잡고 광주에 총격전 있는 것을 서로 끝내도록 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무기 사용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그렇게 끝냈기 때문에 이런 걸 다 쳐본다면 내가 서울지검장 하고나서 총장 안 된다는 법도 없어요. 안 시켜요. 정권 바뀌고 다른 사람이 돼도. 장관이 되도 안 시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닌데. 그때 박종철군 사건 때 눈감고서 봐줬어야 된다 이거죠. 그때 대통령도 좋아하지만, 그 뒤에 노태우 대통령이니 김영삼 대통령이니 이런 사람들도 그냥 넘어갔다 이거죠. 그러면 왜 그런 것을 못 견디고 했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그렇게 위에서 고문 당해서 죽은 박종철이를 심장마비로 밀어붙여서 그냥 끝내서 원인 불명 사망자 측에 넣어서 그냥 이상 끝 하려고 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기를 쓰고 끝까지 밝혀냈느냐.' 나는 그래요. '사람의 목숨은, 어느 게 정의냐 인권 보호하는 게 우리 국가의 의무가 아니냐. 그래서 나는 했기 때문에.' 위에서 그저 여기저기서 경찰 통해서, 안기부 통해서 오기도 하고 청와대 뜻이, 검찰 상부에 총장, 장관 통해서도 왔는데 네가 쥐뿔도 없는 처지에 네가 뭐 잘났다고 그러냐,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보낸 건 우리끼리 너 정도면 잘 감도 잡고 무난하게 부검 안 하고 넘어갈 것 같아서 했다 이거죠. 하는 거 보니까 너야말로 아주 믿을 구석이라곤 한 곳도 없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나오고. 상당히 내가 시련을 겪었어요. 나중에는 흘러 가다 보니까 2년 후배가 총장이 되는 바람에 나는 후배한테 양보하고 나왔어요, 사표 쓰고. 그게 나한테는 보복입니다, 일종에. 변호사를 하는데 웬만한 큰 로펌이나 큰 기업에서 날 데려다가 고문을 시키거나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데 이 사람들이 다 방해했어요. 왜 하필이면 그 사람한테 가냐. 기업인들은 정부에 미운 털 박힌 사람은 하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요새 말하는 블랙리스트 같은 데 올라있었다는 거죠. 나도 불이익을 당했다니까요.

- 기자: 당시 우선 고문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 최환: 사망 원인은 물고문으로, 갖은 방해와 여러가지 술책에 굽히지 않고 내가 밀어붙였잖아요. 내가 물고문이라고 최종 확인을 했으니까. 딱 최종 확인하고 위에 보고하러 갔더니 나한테 윗분이 이제 자네는 자네 공안부장으로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공안 사건 처리하는 데 주력을 하라. 그럼 이거 범인 누가 잡습니까, 그랬더니 아 그건 형사부에 맡겨 하더라고요. 신창원 부장, 안상수 검사, 박상옥 검사. 맡겨 놓으니까 경찰들은 박수를 치고 쌍수를 들어 환영하죠. 야, 우리 말 잘 듣는 사람들이 왔다. 그래서 제일 먼저 말 듣나 안 듣나 시험하는 게 우리가 초동수사를 해서 보내겠으니, 우리가 보내주는 결과를 받아주세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나같으면 무슨 소리 하느냐, 너희들이 지금까지 신용을 쌓아 놓았느냐 말이지, 안 했잖느냐, 나를 우선 납득을 시키라고 했을텐데. 당연히 했더라면 5명 다 밝혀냈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너희들이 초동수사 해서 송치하라, 경찰은 박수를 치고 때를 만났다 해서 딱 2명만, 우리가 철저히 조사했더니 달랑 둘이서 했습디다, 둘이 했다고 한 이야기를 내가 나중에 들었어요, 안 검사한테. '어떻게 됐어?' 그랬더니 수사 지휘를 해서 경찰에서 잡아서 보낸 사람이 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로 구속기소하고 끝냈습니다, 신문에도 났구요. 그래서 야, 정신 똑바로 차려라. 어떻게 물속에 안 들어가려고 막 바둥대는, 체격이 괜찮은 애를 어떻게 달랑 두 명이 제압해서 물 먹이냐, 안 돼요. 팔 한 쪽씩 잡는 거야, 하나 둘 잡고. 다리 둘 잡고, 그럼 넷, 머리 처박으면 다섯 아니예요. 다섯이란 이야기가 처음부터 내 입에서 나왔다고. 나는 지금 범인 수사는 내가 배제돼서 안하지만 다섯 명 정도는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 하고는 구속기소했어요. 범인 수사에서 제1과제가 이미 빵꾸가 났습니다. 제2는 뭐냐. 교도소에 갇혀 있는 두 사람, 경찰관이 울고불고 하면서 '우리는 억울합니다, 우리보다 선배들이 세 사람 더 있습니다.' 해서 다섯 명 실명을 밝힙니다. 그것을 안상수 검사를 면회 신청해서 교도소를 오게끔 해서 줘요, 우리 억울합니다. 그러면 재수사해야죠. 당연하죠. 안 했어요. 왜 안 했느냐? 위에서 못하게 한다 이거예요. 내 이야기는, 위에서 못하게 한다고 하면 너도 안했어야 했는데, 위에서 하지 말라고 한 걸 빡빡 우겨서 부검한 거 아니냐, 물고문 밝힌 거 아니냐, 이거는 명백히 세 사람 더 있다는 걸 양심선언했는데 안 했어요. 수사 두 번째 미스죠. 첫 번째 미스는 경찰로 보내서 다섯 명 중 셋을 빼고 둘로, 은폐했다, 축소했다. 두 번째는 다섯 명인 걸 알면서도 재수사 안했다, 직무유기했다. 그렇게 나오니까 이 사람들 안 되겠다, 교도관들이 협조를 하기 시작합니다, 아까 말한 두 사람이 양심선언했다는 사람, 그 사람들 이야기를 이부영한테 알려주는 거예요. 이부영씨, 저쪽 방에 있는 사람은 밤새 우리 잠도 못자게 엉엉 우느냐, 이 양반들 기가 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해서 아침에 둘이, 경찰관 두 사람하고 이부영씨하고 만나게 해줍니다. 아침 체조시간에는 다 모이니까. 거기서 이야기를 다 하는 겁니다, 이부영이 다 적었어요. 적어서 교도관 보고 이거 저쪽에 홍제동의 성당에 내 친구, 김정남 씨가 숨어있다. 그 사람 줘서 김승훈 신부한테 의논해서 김수환 추기경한테 명동으로 가져가서 거기서 터뜨려야겠다, 여기까지 나온 거지. 5월 15일경에 김수환 추기경한테까지 보고가 됐어요. 그러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내가 참 군부독재 소리도 많이 듣고 했어도, 좀 웬만한 건 우리 사회 평온을 위해서 넘어가려고 아무 소리 안 했는데, 이거 보니까 팔팔한 대학생 하나 죽여놓고 엉뚱하게 딴 걸로 꾸미려고 하는 거 보니까 내가 용납 못하겠다 해서 발표하라. 날짜를 광주 5.18에 맞춰서 그때 하자 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제일 중요한 상황에 나한테 솔직한 이야기가, 범인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줬으면 나는 해냅니다, 나한테 저 사람들이 다시 말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처음부터 자기들은 축소해서 덮으려고 하던 것이 안 되고, 내가 소상하게 아니까, 다시 해서 나한테 수사까지 맡겼으면 내가 경찰에 보내는, 그런 초동 수사를 경찰에게 맡기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내가 안 한다, 이거죠. 금방 보면 다섯 명 앉혀 놓고서 누구 누구 어떻게 뭐 맡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다 이야기하거든. 나는 팔 잡고, 나는 오른팔 잡고, 왼팔 잡고, 왼다리 잡고, 오른다리 잡고, 머리 처박고. 딱 맞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나면 문제가 없이 깨끗하게 경찰은 자기들 책임도 지고 대통령으로부터 그 신신당부하는 말을 듣고도 이행을 못했잖아요, 화장해서 묻어버리는 일을 못하니까. 자기들은 할말이 없지만 그러나 내가 그 수사를 맡아서 하게 되면 자기들은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최 부장을 어길 수가 없어서 손 들고 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형사부 쪽에 사건을 맡겨 놓으니 이 사람들은 경찰에 송치해서 기초 조사를 해라, 하고서 넘기라 하니까. 기초 조사가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부검 때 다 밝혀냈기 때문에 기초 조사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새로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해서 내가 배제가 된 게 첫 번째 큰 잘못인 거고. 두 번째는 그렇게 축소가 되고. 세 번째는 직무유기한 거. 여기 때문에 결국은 경찰이 둘러 쓰는 오명이랄까, 비난을 검찰도 둘러 쓰고 있어요, 현재로. 검찰, 경찰은 그저 은폐하고 축소하고 덮기에 바빴다고 나와요. 내가 왜 그 소리를 들어야 돼요? 나는 그렇게 부당하게 덮어버리려고 애쓴 사람은 아니잖아요. 덮어버리지 않고 밝혀서 뭔가 우리나라에서 고문이란 말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사전에서 사라지고 얼마든지 고문 없는,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고 마음 먹고 나가는 사람이니까. 나중에 이한열이 앞장선 시위도, 고문을 했더라도, 고문 가지고 시비 없는 걸로 되면 나중에 나아질 수 있고, 고문해서 수사해서 다섯 명 전부 다 처벌해서 구속기소를 해놨다, 따라서 여기는 아무런 흑막이 없다고 하면 대학생들 데모를 안 하죠. 안 했으면 이한열이가 앞장을 안 서지 않습니까. 그러면 최루탄 맞고 죽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당장 그건 현실로 드러난 겁니다. 내가 말하는 대로 사망 원인은 물고문 치사다, 그래서 여기에 관련자들이 다섯 명 있어서 수사해서 구속기소하고 처벌했다 그러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데모 좋아하는 학생들이라도 데모할 이슈가 없잖아요. 그래놓고 데모를 할 이슈도 없고 그냥 끝났으면 좋은데. 이제 와서는 평가가 검찰도 경찰하고 똑같다, 은폐 축소했다, 또 불명예스러운 소리를 또 들어요. 그걸 보면 박종철이 형이 박종부씨라고 있어요. 박종부씨 같은 사람은 그러죠, 그거 최환 검사장한테 맡겼으면 깨끗하게 딱 완벽한 수사를 끝냈을 텐데, 우리도 마음의 상처를 덜고 데모하는 학생들도 납득을 했을텐데, 이게 무슨 꼴이냐, 이렇게들 나오니까 참 우리가 봐도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검찰이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1차, 2차 수사에 미스를 범했으면 거기에 따른 책임을 추궁해 줘야 해요, 우리 내부에 있는 검사나 수사관들한테. 하나도 안 했어요. 거꾸로 신창원 부장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특진을 하고 가죠, 안상수 검사는 국회의원 4선인가 5선 하고 당 대표, 또 원내대표도 하고. 박상옥 검사는 대법관으로. 2015년에 대법관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몇 십년은 또 기다려서 자리 나오면 해주는데, 나같은 사람은 당장 안 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게 뭐냐, 나에 대한 벌이고 일종의 보복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최 부장이란 사람이 엉뚱한 데 개인적인 욕심 가지고 한 거 아니냐, 하는 오해가 생길수가 있어서 안 했는데. 실제론 그런 상황이. 어떤 사람들은 그랬어요. 검사가 시체 사망 진단서나 시체 검안서 가져가면 그거야 뭐 부검을 하라던가, 화장을 해서 유가족에게 돌려주라고 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 것 가지고 뭘 대단한 일 한 것처럼 저렇게 난리냐, 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난 내가 죽을 생각까지 다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검사, 고종 황제 때부터 검사 1호가 누군지 압니까. 이준 열사예요. 그분이 그냥 과거에 합격했지만 일반직이 아니었다니까요. 그분이 고종 황제의 밀사로 일본이 와서 우리 국권을 탈취해갔다, 이것을 만방에 호소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갔잖아요. 결국은 하다하다 문을 두드렸어도 안 되잖아요, 일본이 막는 바람에. 거기서 분사했잖아요. 뭐 할복을 했냐, 아니면 독을 마셨냐, 목을 맸냐는 다음 이야기지만. 그런 기개가 없으면 안 되는데. 제가 생각할 땐 이렇게 되어간다면 뭐 내가 뭐 목숨을 걸 것까진 않지만, 그분들이 더 심하게 했으면, 쪼는 것이, 심하게 했으면 나도 그렇게 항거할 수 있었어요. 그분들도 설명을 하다가 내가 납득을 시키면, 내가 큰 거는, 아니 어떻게 젊은 학생을 죽이기까지 하느냐, 그것도 물고문까지, 그런 야비한, 야만적인 행동으로. 그게 제일 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을 못하게 수사도 못하게 하고. 목숨을 빼앗았다는 게 가장 큰 일이고. 두 번째는 이렇게 하다가는 88년 내년, 그때 87년이니까 88년 올림픽을 어떻게 치르려고 하느냐, 내가 이 이야기까지 했다고. 지금까진 86년도에 우리가 아시안게임 하면서 잘했거든요. 대한민국에 대해서 박수를, 우리가 쳐줘서 받았는데. 1년 채 지나가기도 전에 87년 1월달에 서울대학생 하나가 조사 받다 고문 당해 죽었는데, 그것을 서울대학교 선배라는 사람이 공안부장으로 있으면서 그냥 화장을 해서 묻어버리려고 했다, 그렇게 내가 했다고 합시다. 그거 세계에 다 알려집니다. 비밀은 없어요. 알려지면 대한민국, 문민국가가 아니고 야만국가네, 이렇게 나온다고요. 한국에 88 올림픽 보이콧하자, 이렇게 나온다고. 그것을 그 사람들은, 위에 청와대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더 걱정했어요. 고문해서 화장해서 묻어버리라는 주문을 그만해야겠다, 저걸 더 심하게 잡고 했다가는 최 부장 저게 어디로 튈지 모르고 무슨 말 할지 모른다 나온 거죠. 거기서 이 사람들도 내 목을 조이다가 내가 헥헥 거리고 넘어갈 즈음 돼서 야, 잘못하다간 올림픽에 지장 있대 그러면서 슬슬 푼 거죠.

- 기자: 이후에 어떻게 지내셨어요.

= 최환: 어떻게 보면 그때 저를 도와주던, 편을 들어주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상관도 없었고, 동료도 없이 내가 밤에 혼자 남아 처리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때 옷 벗고 나갈라니까, 올림픽까지 참으라는 소리 나오잖아요. 참다 보니까 88년이 됐는데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장에서 남부지청에 차장검사로 갑니다. 가서 하니까 거기 또 일도 해야 하고, 그리고 아까 말한대로 87년 개헌이 되고 선거가 있어서 김영삼 대통령이 됐죠. 나는 민주 세력을 위해서 좋은 일 해줬는데, 이 사람들은 그게 아니예요. 화근이겠다. 화근 덩어리가 된다. 그때 다행히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됐어요. 내가 김영삼씨에게 평소 대통령으로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게 이분은 바로 이 박종철 사건을 내가 흔들림 없이 내가 끝까지 초지일관해서 검사로서 아주 정의롭게 처리했다는 분이예요. 그래서 이분이 대통령이 되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선언하고, 그러고 나서 총체적으로 지휘,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골라야겠다. 최환이가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이제 그 양반이 그 합당한 자리를 줘야겠다 해서. 나도 또 올라갈 차례가 되긴 됐죠. 나중에는 남부 검사장까지 하고, 다시 대검 공안부장, 검사장까지 올라오고,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갔으니까. 그때 무렵이예요.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그러니까 검찰국장 하고 있습니다. 검찰국장에서 서울지검장으로 가면 어떤가, 흔히 그렇게 가는 자리입니다. 그 대신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어떤 권한을 위임해주느냐가 중요합니다. 검사장으로 발령을 내라, 역사 바로 세우기 하라면서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부터 잡으라. 잡을 게 많잖아요. 그러니까 수천억씩 거둬들인 뇌물, 12.12 쿠데타가 5.16 쿠데타랑 성격이 다른 거다. 이거는 12.12는, 5.16은 민생도 해야 하고 북한보다 경제가 떨어지고 북한의 재래식 무기도 우리보다 더 강했어요. 그러니까 저것 가지곤 안 되겠다, 하면서 나온 이야기가. 이대로 가다간 4.19 이후에 무질서하게 맨 데모만 하고 그랬거든요. 이러다가 나라 망하게 생겼고, 북한에 먹히겠다, 이렇게 해서 나온 거 아닙니까. 명분이 나름대로 생겼고, 나와서 3선 개헌 하면서 영구집권 계획을 유신헌법 가지고 했다는 것만 잘못했지, 나머지는 산업화에 성공했고 민주화에 어느 정도 달성을 시켰어요.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대통령 같은 이 하나회 중심으로 되어있는 육사 11기, 12기들이 모이면 자기들은 일단 한국의 정치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 세 사람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현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군대가 딱 가서 있으면 그 세 사람이, 삼김이 제대로 못하고 저 난리치고 하면, 안에 있는 분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렇게 해서 하면 간단해요. 민간 정치인들한테 인계를 하고 나왔는데.
이 양반들이 실수를 한 거예요. 그때 자기들은 그 생각이 없었지만 그때 최규하 대통령이, 내가 민간 대통령 갖곤 어려워서 안 되겠고, 여러분이 나와서 맡아달라 그래서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말은. 자기 회고록인가, 무슨 거기에다가 그렇게 썼어요. 전두환 대통령, 그분의 책에 최규하 대통령이 자기한테 적극 대통령 맡아달라고 했다던데, 그건 거짓말이예요. 거기서 하라고 돌아갔으면 민간인들, 삼김이 항상 그 사람들이 동향이 극적이 되고 관심이 쏠리게 마련 아니예요? 가서 저 사람들이 선물을 크게 주고 갔는데 싸우지 말고 정치 잘해보자, 정치는 군인이 하는 게 아니라 민간인 정치인들이 하는 것이다, 모범을 보여주자 했으면 됩니다. 그러면 광주 사태도 안 일어나요. 삼김이 잘못 하잖아요, 4.19 이후에 5.16도 하고 그랬는데. 그때도 조용하지 않아서 죽은 거지. 이 사람들은 분해서 늘 바라보면서 잘못 하면 경고도 하고 그랬을텐데, 자기들이 정권 잡은 거예요. 잡다 보니까 광주에서 김대중씨가 반발하고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고 그랬는데. 나도 그 이야기를 12.12 사건까지 처리하면서 그때 내 견해를 이야기했어요. 여러분들이 쿠데타를 해서 정권 잡은 거는 잘못된 겁니다. 그건 또 내 손에 의해서 처벌받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5.18 문제도 해결이 되고 하니까. 그걸 가지고 김영삼 대통령이 퍽 나한테 수고했다 소리를 해요. 그러면 또다시 검사가 뭐 도와줄 것 없냐 하니까. 저기,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주변 사람하고 처벌을 하다 보니까 하나회가 자꾸 걸립니다, 하나회 해산을 시켜 주십시오. 그것 또 돈을 막 사방, 조 단위로 굴리니까 저걸 또 추적을 해야할 것 아니예요. 그러니까 금융 실명제, 도와주십시오. 부동산 실명제가 나와야할 것 아니예요. 부동산 실권리자 등기, 실권리자 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 그것도 실명제라고. 그러니까 대통령이 그걸 또 다해주는데, 내가 못한다 할 수 없잖아요. 그 바람에 잠깐 내가 사표 쓰고 나가는 게 멈춘 겁니다. 바로 집행이 안 되고. 그러고 나서 탁 나왔으면 좋은데,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내가 또 김영삼씨가 임기말로 끝나고. 김대중 대통령이 됐지 않습니까. 되자마자 첫 번째로 한 게 최환이 몰아내기예요. 그 양반이 안 그럴 것 같은데, 자기 도와줬는데 사실은, 나보다 2년 후배를 올려줘요. 보복이 없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감내했냐. 내 철학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집안, 선비 집안이 직언 같은 건 거리낌 없이 하고 뜻을 관철시키고 안 되면 귀향 가는 거죠, 뭐.

- 기자: 그런 직언을 오늘날 공직자들이 하지 못해, 하지 않아 국정농단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 최환: 지금 그 사람들이, 박근혜, 이명박 대통령이라던가, 이명박 대통령서부터 나오는데 그런 것을. 지금 사람들이 내가 옛날에 어떻게 했는가를 보고, 아니면 나를 불러다가, 어떻게 처리해왔으며 어떻게 하는 게 낫겠냐고 물으면 내가 이야기하죠. 직언하시라, 듣기 싫으면 그 다음날 또 한 번 이야기하고, 안 되면 다른 사람하고 같이 가서 하고. 그렇게 해서 안 통하면 대통령한테 임금님한테 상소 해서 안 되면 사표 쓰고 나가잖아요, 사표 쓰고 나갔으면 그 사람들이, 물론 어떻게 저런 어떻게 보면 좀 제대로 모든 걸 다 갖춘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분이. 세월호 사건도 터졌는데 화장 고친다고 시간 허비하고, 화장 고치더라도 가서 현장에 헬리콥터 가서 진두지휘하시죠, 했어면 했을 거 아니예요. 그런 소리를 대통령이 몰라서 못하면. 실장이 잘못한 거예요. 김기춘 실장이, 자기가 가야 해. 대통령이 원래 화장하다 보면 시간이 걸리니까, 아는 건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자기가 헬리콥터 대기시켜 놓고 비서실장이니까 국무총리 타라, 해양수산부 장관 타라, 진두지휘하면 윗분들이 와서 설친다 하면 뭔가 달라도 달라요. 그러면 100명 정도는 더 건졌을 거예요. 가라앉는 거 바라보고 앉아서 텔레비전 보면 지금도 분이 나요. 어떻게 된 게 멀거니 극장 구경하듯이, 영화 구경하듯이. 영화 구경하고 앉았다니까. 가라앉는 거 보고. 내 직을 걸고서, 더 나빠지면 내 생명까지 걸고, 우리 집안 나서서 저것을 내가 고문을 추방하지 않으면, 내 단계에서, 나는 고문 추방, 인권 보존, 그거가 내 가장 큰 거예요. 내 생애 다시 이런 기회라는 건, 지금은 공안부장일 때 왔는데, 나중에 검사장 되서 그런 기회가 오면 좋지만, 안 오면 그냥 넘어가는 거 아닙니까. 나는 공안부장일 때 그런 기회가 왔길래, 이때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 하다 보니까 그런 것이 생기고. 내가 일을 피하지 않고 일을 좇아 다니니까 일들이 제때 따라와준 거. 끝나서 남부청에 차장으로 갔다가 대구청에 차장으로 갔는데, 그때 한 게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예요. 그거 아무도 모르고, 차장검사가 부장들 모아놓고 수사관들 급파해서 이틀 만에 해결했어요. 그니까 나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고, 어떻게 하는 것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해요, 그걸. 시켜놓고 나 퇴근한다 해버리면 그 다음날에도 결과 보고가 없어요. 그니까 그런 식으로 현장을 누비기도 하고, 차장 검사면 높습니다, 검사장 다음이예요. 그게 유명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건들이 나를 따라서 와요. 용팔이 사건 같은 것도 87년 4월달에 일어난 건데. 그걸 내가 왜 손댔냐, 그건 정치 테러 행위예요. 창당을 하는데 왜 방해한다고 각목, 헬멧 쓰고 장갑 끼고 쫓아가서 팹니다. 그러면 안 되거든요. 87년도가 이한열이가 관련돼서 고문 추방과 인권 보존, 그것도 문제고. 이한열도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총을 쏜다는 건 안되니까, 인권 보존. 용팔이 사건은 정치 테러를 처단해서 이 땅에 정치 테러는 없다, 선언하기 위한 것인데. 그거는 해방 직후에 김두한 씨 중심으로 각목 휘두르고 그랬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그걸 제대로 했기 때문에 최근에 국민의당에서 자기들끼리 패가 갈려서 전당대회 한다는데, 한쪽에서 각목 들고 와, 헬멧 쓰고 와, 가죽장갑 끼고. 그거 봐요. 그때 안했으면 벌써 갖다 놓고 해치웠을 거라고. 검사 하면서도 정치는 안 하지만, 그걸 딱 알아서 하면 그 나름대로 나중에 끝나고 나서 참 내 스스로도 자부심도 느끼게 되고. 이렇게 하니까 또 무언가가 있구나, 하면 그 일을 따라서 쭉 살다 보면 가는 길이 보여요. 내가 못하면 후배 보고 이리 갈 테니까 미리 가서 막아서 지키고 있어라, 해서 잡는 거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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